“혜원아.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


선영 언니가 잔뜩 신난 얼굴로 운을 떼었다.


“지난번 내가 소개한 커플 있잖아. 너의 책을 읽었다던… 얼마 전 만났는데 ‘작가님 책을 읽었을 땐 세상 평화롭게 파도를 탈 거라 상상했는데 웨팍에서 만나보니 눈에서 불을 뿜으며 열심히 타시더라구.. 뭔가 상상과 달랐어’라고 하더라”


그 이야길 듣고 언니와 깔깔 웃었다. 충분히 그럴만하다. 놀랐을 그분을 생각하니 일부러 속이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조금은 미안스럽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다. 패들을 하는 순간부터 라이딩을 끝내는 순간까지 나의 미간은 긴장으로 살짝 좁아져 있으며 야무지게 앙 다문 입은 벌어질 줄 모른다. SNS에 올린 나의 라이딩 사진 아래에는 ‘혜원이... 집안에 우환 있니?’라는 댓글이 달린다. 활짝 웃으며 예쁘게 파도를 타는 서퍼들의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는 중이다. 나는 파도를 잡는 것에, 일어서는 것에, 달리는 것에 아직도 익숙하지 않아 집중을 해야만 나의 파도를 온전히 즐길 수 있다. 그러니까. 신상에 문제가 있는 듯한 그 표정은 진심으로 즐기고 있단 증거다. 한참 웃다 선영 언니에게 말했다. “그것이 나의 평화라고 전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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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피식 웃음이 났다. 눈에서 불을 뿜고, 심각한 얼굴로 라이딩을 하며 좌절의 순간을 맞이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같은 표정이지만 전혀 다른 감정을 느꼈던 나날들. 왜 나는 서핑 실력이 늘지 않을까.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왜 고쳐지지 않을까. 왜. 왜. 왜. 파도를 제대로 잡거나 타지 못한 날엔 땅굴을 깊이 팠다. 파도에겐 잘못이 없으니 ‘나는 왜 이럴까’라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즐긴다’라는 표현이 반드시 웃는 얼굴을 동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앞과 같은 의식의 흐름이 즐김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불필요하도록 자기 파괴적이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눈에서 불을 뿜는 것이 나의 평화라 답할 수 있게되어 기쁘다. ‘왜 이런 걸까’ 대신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덕분이다. ‘왜’를 ‘어떻게’로 바꿨을 뿐인데 더 이상 자기파괴는 하지 않는다. 그저 앞으로 나가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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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변화는 당신이란 서퍼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바다와 웨이브 파크에서 서핑이 제대로 되지 않아 무너질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채고 말을 걸어오는 당신이란 서퍼. 위로하고 함께 고민해 주는 당신이란 서퍼. 테이크오프를 할 때 머리가 떨어진단 말에 아파트 옥상!을 외치면 시선이 올라간다는 마법의 주문을알려주거나, 팔을 충분히 펴지 않고 일어서서 보드가 흔들리는 나쁜 버릇, 손의 위치가 좋지 않아 노즈가 앞으로 박히는 진실 등을 알려주는 당신이란 서퍼. 어떤 이들은 구체적인 방법 대신 다정한 말을 건넨다. 부드럽게 잘 타고 있어요. 이전보다 나아진 것이 보여요. 나도 그 마음 알아요. 나의 손에 초콜릿을 꼬옥 쥐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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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온 마을이 키운다’는 말이 있다. 아이가 자라나기 위해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도움, 보살핌이 필요하단 뜻이다. 서퍼도 마찬가지다. 서핑을 하며 성장하는 모든 과정에 당신이란 서퍼가 있었다. 그대 덕분에 서핑을 포기하지 않고 즐길 수 있다. 이것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카페, 유튜브, 채팅 커뮤니티, 오프라인 커뮤니티, 서핑 샵 등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위로를 하고 응원을 하며 서로를 키운다. 서핑은 파도와 서퍼만의 상호작용으로 보이지만, 나 홀로 바다에 떠있는 걸 상상하면 너무 외롭다. 바다에 함께 떠 있어주는 당신, 내가 라인업을 포기않게 해주는 당신, 나의 파도를 지켜봐주는 당신, 오늘의 서핑이 끝나고 이야기를 나눠주는 당신. 우리 모두는 당신이란 서퍼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우리 서로에게 이런 인사를 나누면 어떨까.


곁에 있어주어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사진 : 현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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